인생잡담/직장인의 창작

[애매한 개발자의 창작 기록 1] 나는 왜 글을 쓰고 싶어졌나

Roslyn 2026. 5. 26.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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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 하세요?”

누군가 직업을 물으면 저는 거의 망설이지 않고 대답합니다.

“웹 개발자입니다.”

이 대답은 틀리지 않습니다.
저는 21년 동안 웹 개발자로 일했습니다. 코드를 쓰고, 오류를 고치고, 화면을 만들고, 서버를 붙이고, 서비스가 어떻게든 돌아가게 만드는 일을 해왔습니다.

그 시간 덕분에 지금까지 먹고살 수 있었습니다.
개발자라는 직업은 제 삶을 지탱해준 가장 현실적인 이름입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 이름만으로는 저를 다 설명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개발자로 살아왔지만, 개발자로만 끝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스스로를 작가라고 부르기에도 아직은 많이 조심스럽습니다.
글을 잘 쓰는 사람도 아니고, 대단한 성과를 낸 사람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계속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이 글은 그 마음이 어디서 시작됐는지에 대한 첫 번째 기록입니다.


1. 시작은 나우누리의 파란 화면이었다

제가 처음으로 무언가를 써서 남에게 보여준 건 중학생 때였습니다.

당시는 하이텔과 나우누리 같은 PC통신이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처럼 세련된 글쓰기 플랫폼도, 편리한 에디터도 없었습니다. 파란 화면 위에 글자를 입력하고,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누군가 읽어주기를 기다리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무협지에 빠져 있었습니다.
책 대여점에서 빌려온 무협지를 읽고 또 읽다가,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도 한번 써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생각하면 별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습니다.
구성도 서툴렀고, 문장도 거칠었고, 인물도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이었을 겁니다. 그래도 그때는 그런 걸 따질 만큼 영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쓰고 싶었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을 붙잡고 싶었고, 이름 모를 인물에게 말을 시키고 싶었고, 내가 만든 세계 안에서 누군가 움직이는 걸 보고 싶었습니다.

그게 제 글쓰기의 시작이었습니다.

물론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학교를 다니고, 군대를 다녀오고, 취업을 하고, 직장인이 되면서 글쓰기는 자연스럽게 멀어졌습니다.

먹고사는 일은 언제나 먼저였습니다.
그리고 먹고사는 일을 핑계로, 저는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2. 개발자로 사는 일은 나쁘지 않았다

개발자로 사는 일이 싫었던 것은 아닙니다.

코드를 쓰는 일에는 분명한 재미가 있습니다.
막혀 있던 오류가 풀릴 때, 복잡하던 흐름이 정리될 때, 아무것도 없던 화면이 사용 가능한 서비스가 될 때의 감각은 여전히 좋습니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알게 된 것도 있습니다.

저는 개발을 좋아하지만, 개발을 아주 잘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
새로운 기술을 빠르게 흡수하고, 어려운 개념을 쉽게 이해하고, 복잡한 구조를 우아하게 설계하는 유형의 개발자는 아니라는 것.

그저 필요한 만큼 배우고, 맡은 일을 처리하고, 문제가 생기면 검색하고, 다시 고치고, 그렇게 직장 생활을 유지해온 사람에 가깝습니다.

이런 말을 공개적으로 쓰는 게 조금 불편하긴 합니다.
개발자라는 이름으로 오래 살아왔는데, 스스로를 대단한 개발자라고 말하지 못한다는 건 어쩐지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요즘은 오히려 그 사실을 인정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발 천재도 아니고, 기술 인플루언서도 아닙니다.
AI 전문가도 아닙니다.
대단한 스타트업을 성공시킨 창업자도 아닙니다.

다만 오래 일했고, 계속 고쳤고, 어떻게든 서비스를 굴러가게 만들어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적어도 한 가지를 가르쳐주었습니다.

무언가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재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
계속 돌아오게 만드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것.

이 생각은 나중에 글쓰기와도 연결되었습니다.


3. 다시 글을 쓰고 싶어진 이유

몇 년 전부터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부터 거창한 목표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겠다거나, 인생을 바꾸겠다는 계획도 없었습니다.

그보다는 조금 더 단순했습니다.

“내 이야기를 하나쯤 끝까지 써보고 싶다.”

오랫동안 개발자로 살아오면서, 제 하루는 대부분 남의 요구사항을 구현하는 일로 채워졌습니다. 물론 그것이 직업이고, 그 일을 통해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제 안에 있는 무언가를 제 언어로 꺼내보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습니다.

코드는 대체로 목적이 분명합니다.
요구사항이 있고, 입력이 있고, 출력이 있고, 오류가 있으면 고치면 됩니다.

하지만 글은 달랐습니다.

무엇을 써야 하는지부터 막혔고, 왜 쓰고 싶은지도 자주 흔들렸습니다.
분명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막상 문서 앞에 앉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어제는 괜찮아 보였던 문장이 오늘은 부끄럽게 느껴졌고, 머릿속에서는 그럴듯했던 설정이 글로 옮기면 힘을 잃었습니다.

그래도 이상하게 다시 돌아오게 됐습니다.

잘 써서가 아니었습니다.
성과가 있어서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결과만 놓고 보면 자신 있게 말할 만한 건 별로 없습니다.

온라인 출판을 한 번 해봤지만 성적은 좋지 않았습니다.
그 경험이 저를 작가로 만들어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나는 아직 작가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더 분명하게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도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아마 글쓰기는 제게 결과보다 방향에 가까운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디에 도착했는지보다,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은지를 묻게 만드는 일.

개발자로 먹고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제 이야기를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 마음이 다시 글쓰기 앞에 저를 앉혔습니다.


4. 글을 쓰고 싶어서 도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문제는 글을 쓰고 싶다고 해서 글이 쉽게 써지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퇴근 후에는 피곤했고, 주말에는 마음만 앞섰습니다.
설정은 쌓이는데 본문은 나아가지 않았고, 제목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시놉시스는 자꾸 흐려졌습니다.

그때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내가 계속 글을 쓰려면 어떤 환경이 필요할까?”

처음에는 단순한 질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은 점점 제가 만들고 싶은 서비스의 방향이 되었습니다.

저는 AI가 글을 대신 써주는 것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물론 AI는 유용합니다. 막힌 부분을 풀어주기도 하고, 생각하지 못한 표현을 제안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AI가 만든 문장이 늘 제 글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필요했던 건 대신 써주는 도구라기보다, 다시 쓰게 만드는 환경이었습니다.

흩어진 설정을 붙잡아주고, 막힌 시놉시스를 다시 보게 하고, 제목 후보를 정리하게 하고, 내가 쓰려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잊지 않게 해주는 공간.

그런 생각에서 메리톡톡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거창한 서비스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처음부터 완벽한 플랫폼도 아니었고, 지금도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그저 제 안의 개발자가 제 안의 아직 서툰 작가를 위해 만들어본 작은 작업 공간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그 방향만큼은 조금 분명해졌습니다.

저는 글쓰기를 대체하는 기술보다, 글을 계속 쓰게 만드는 구조에 관심이 있습니다.


5. 나는 아직 애매한 사람이다

이 연재의 제목을 “애매한 개발자의 창작 기록”이라고 붙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개발자로 오래 살았지만, 개발 실력을 앞세워 브랜딩하고 싶은 사람은 아닙니다.
글을 쓰고 싶지만, 작가라고 당당히 말하기에도 아직은 부족합니다.
AI 도구를 다루고 있지만, AI 전문가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애매합니다.

하지만 요즘은 그 애매함이 꼭 약점만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개발자로 오래 일했기 때문에 서비스를 만드는 현실을 조금은 압니다.
글을 써보려다 자주 막혔기 때문에 창작의 막막함도 조금은 압니다.
대단한 성공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압니다.

어쩌면 제가 기록할 수 있는 건 성공한 사람의 방법론이 아니라, 아직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 계속하려고 애쓰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이 블로그와 이 연재는 그런 기록이 되기를 바랍니다.

잘난 척하기 위한 기록이 아니라,
잘하고 싶지만 아직 서툰 사람이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기록.

개발자로 살아왔고,
글을 쓰고 싶고,
그래서 글을 계속 쓰기 위한 도구를 만들고 있는 사람의 기록.

첫 번째 글은 여기서 시작하려고 합니다.

저는 아직 무엇 하나 선명하게 잘한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글을 쓰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만큼은 오래전 나우누리의 파란 화면 앞에 앉아 있던 중학생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음 기록

다음 글에서는 조금 더 불편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한 번 온라인 출판을 해봤지만, 저는 여전히 스스로를 작가라고 부르기 어렵습니다.
왜 그런지, 그 경험이 제게 무엇을 남겼는지 정리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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