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잡담/직장인의 창작

[애매한 개발자의 창작 기록 4] AI보다 먼저 필요한 건 쓰는 습관이었습니다

Roslyn 2026. 6. 2.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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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려고 서비스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이야기를 오래 쓰다 보면 제가 만든 설정도 희미해졌고, 네이버 카페에서 본문과 설정 게시판을 오가며 글을 쓰는 일이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을 쓰는 화면 옆에서 언제든 설정을 볼 수 있는 작업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글을 쓰는 흐름을 끊지 않고, 제가 정해둔 인물과 세계관을 바로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메리톡톡을 만들기 시작한 첫 번째 이유였습니다.

그러다 AI가 등장했고, 한때는 AI가 초안을 써주거나 리뷰를 해주면 창작의 막막함이 꽤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그런 기능을 붙여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서비스를 만들고, 기능을 붙이고, 다시 사용해보면서 조금 이상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도구는 점점 생기고 있는데,
정작 저는 글을 쓰고 있지 않았습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습니다.

글을 쓰기 위해 서비스를 만들었는데,
서비스를 만들다 보니 글쓰기에서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알게 됐습니다.

제게 먼저 필요했던 것은 더 똑똑한 AI도, 더 많은 기능도 아니었습니다.
먼저 필요한 것은 다시 앉는 습관이었습니다.


1. 쓰기 편한 도구가 없어서 못 쓴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도구의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글쓰기 화면이 불편해서.
설정을 확인하기 어려워서.
아이디어가 흩어져서.
시놉시스와 본문이 따로 놀아서.

물론 이 문제들은 실제로 있었습니다.

긴 이야기를 쓰려면 설정을 계속 확인해야 하고, 이전에 써둔 내용을 다시 찾아봐야 합니다. 인물의 관계, 장소의 이름, 세계관의 규칙, 앞에서 던져둔 사건 같은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생각보다 쉽게 흐려집니다.

그래서 글쓰기 도구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저는 도구가 문제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좋은 에디터가 있으면 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설정을 옆에 띄워주는 화면이 있으면 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AI가 초안을 제안해주면 막힌 부분을 넘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 기대가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도구는 분명 도움이 됩니다.
좋은 화면은 글쓰기의 마찰을 줄여줍니다.
AI도 잘 쓰면 막힌 생각을 다시 움직이게 해줍니다.

하지만 도구가 아무리 좋아도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제가 그 앞에 앉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 습관이 끊기는 건 생각보다 조용했습니다

한동안 저는 퇴근 후에 글을 썼습니다.

하루에 30분 정도.
길어도 1시간 정도였습니다.

대단한 분량은 아니었습니다.
매번 만족스러운 글을 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그 시간이 쌓이면 이상한 안정감이 생겼습니다.

오늘도 조금 썼습니다.
어제 쓰던 것을 다시 열었습니다.
제가 만든 인물과 세계를 완전히 놓지는 않았습니다.

그 사실이 저를 글 쓰는 사람 쪽에 조금 더 가깝게 데려다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습관이 끊기는 건 생각보다 극적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은 피곤해서 쉬었습니다.
다음 날은 일이 늦게 끝났습니다.
그다음 날은 다른 급한 일을 처리했습니다.

처음에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루 쉬었다고 글쓰기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이틀 쉬었다고 제가 글을 포기한 건 아니니까요.

그런데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사흘이 되고, 사흘이 일주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글을 쓰지 않는 상태가 더 자연스러워졌습니다.

무서운 건 멈춘 날이 아니었습니다.

멈춘 상태에 익숙해지는 것이었습니다.


3. 글쓰기는 의욕보다 리듬에 가까웠습니다

예전에는 글을 쓰려면 의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시간이 충분하고, 컨디션이 괜찮고,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런 날은 좋습니다.
그런 날에는 글도 조금 더 쉽게 나옵니다.

하지만 그런 날만 기다리면 글을 거의 쓰지 못합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글을 쓴다는 것은 대부분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 쓰는 일이었습니다.
조금 피곤한 상태에서, 시간이 애매하게 남은 상태에서, 내일 할 일이 생각나는 상태에서, 그래도 문서를 여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글쓰기는 의욕보다 리듬에 가까웠습니다.

매일 많이 쓰는 것보다,
자주 돌아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한 번에 좋은 문장을 쓰는 것보다,
어제 쓰던 문장을 오늘 다시 보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거창한 결심보다,
작게라도 같은 자리에 앉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그 리듬이 끊기면 글은 금방 낯설어집니다.

제가 쓰던 이야기도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고,
제가 만든 설정도 다시 읽어야 이해되고,
어제는 중요해 보였던 장면도 오늘은 왜 썼는지 모르겠어집니다.

그래서 글쓰기에 필요한 것은 단순한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리듬이었습니다.


4. AI가 있어도 제가 쓸 것이 없으면 소용없었습니다

AI 기능을 붙였을 때 처음에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초안을 만들어주면 빈 화면의 부담이 줄어들 것 같았습니다.
리뷰를 해주면 혼자 쓰는 외로움이 줄어들 것 같았습니다.
제목이나 소개 문구를 제안해주면 시작이 쉬워질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도움이 되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AI는 빠르게 후보를 만들어줍니다.
놓치고 있던 관점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제가 쓴 내용을 요약하거나 다른 방향을 제안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분명해진 것도 있습니다.

AI가 글을 써줄 수는 있지만,
제가 무엇을 쓰고 싶은지까지 대신 정해주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붙잡고 싶은 인물이 누구인지.
이 이야기를 왜 쓰고 싶은지.
어떤 장면에서 마음이 움직이는지.
제가 정말 버리고 싶지 않은 문장이 무엇인지.

이런 것들은 결국 제가 자주 마주해야 알 수 있었습니다.

글을 쓰는 습관이 없으면 AI에게 줄 재료도 흐려집니다.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 채로 AI에게 묻다 보면, 그럴듯한 답은 많이 얻을 수 있지만 제 이야기와는 점점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AI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제가 다시 원고 앞에 앉는 일입니다.

AI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순서가 달랐습니다.

먼저 제가 쓰는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다음에 AI도 도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5. 메리톡톡은 다시 돌아오는 구조를 고민해야 했습니다

이 경험은 메리톡톡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글쓰기 화면에서 설정을 함께 보는 구조가 중요했습니다.
그다음에는 AI가 초안과 리뷰를 도와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앞에 있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 서비스는 사용자가 다시 글을 쓰러 돌아오게 만들 수 있을까?”

화려한 기능이 많아도, 사용자가 돌아오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AI가 좋은 답을 해줘도, 사용자가 자기 원고를 다시 열지 않으면 글은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메리톡톡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기능 목록이 아니라, 다시 앉게 만드는 흐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제 쓰던 글을 쉽게 다시 여는 것.
마지막으로 어디서 멈췄는지 알 수 있는 것.
설정과 본문이 분리되지 않는 것.
작은 기록이라도 쌓이는 느낌을 주는 것.
며칠 쉬었다가 돌아와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

이런 것들이 자동완성보다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글쓰기를 대신해주는 도구보다,
글쓰기 자리로 다시 데려오는 도구.

지금의 메리톡톡은 그 방향을 향해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완성된 서비스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가 무엇을 중요하게 보고 있는지는 조금 더 분명해졌습니다.


6. 습관은 의지보다 구조에 가까웠습니다

여전히 저는 매일 글을 쓰지는 못합니다.

이 글을 쓰면서도 조금 민망합니다.
습관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정작 매일 쓰지 못한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과 달라진 점은 있습니다.

이제는 글을 못 쓰는 이유를 단순히 의지가 약해서라고만 보지 않으려 합니다.

물론 의지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의지만으로 오래 버티기는 어렵습니다.

퇴근 후에 바로 앉을 수 있는 환경이 있는지.
어제 쓰던 글을 쉽게 다시 열 수 있는지.
무엇을 쓰려고 했는지 바로 떠올릴 수 있는지.
오늘은 한 문장만 써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
며칠 쉬어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구조가 있는지.

이런 것들이 습관을 만듭니다.

습관은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힘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기 쉽게 만드는 구조에 더 가깝습니다.

제가 서비스를 만들면서 확인한 것도 결국 이 부분이었습니다.

기술을 만들고 있었지만, 정작 찾고 있던 것은 기술보다 더 기본적인 것이었습니다.

글을 쓰는 자리.
다시 돌아오는 리듬.
작게라도 이어지는 기록.

AI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그것이었습니다.


7. 오늘도 쓰는 사람에 가까워지기 위해

아직 저는 작가라고 자연스럽게 말하지 못합니다.

매일 글을 쓰는 사람도 아니고, 꾸준히 작품을 완성해내는 사람도 아닙니다.
서비스를 만들고 있지만, 그 서비스가 제 글쓰기 문제를 모두 해결해준 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예전보다 조금은 분명해진 것이 있습니다.

저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기 전에,
먼저 글을 계속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계속 쓴다는 것은 매일 긴 분량을 써내는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한 문장만 쓰는 일이고,
때로는 어제 쓴 문장을 다시 읽는 일이고,
때로는 며칠 쉬었다가 다시 문서를 여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완벽하게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놓지 않는 것입니다.

메리톡톡도 결국 그런 방향의 서비스가 되었으면 합니다.

멋진 문장을 대신 써주는 서비스보다,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완전히 놓지 않도록 돕는 공간.

그리고 그 첫 번째 사용자는 여전히 저 자신입니다.


다음 기록

다음에는 “그럼 무엇을 쓸 것인가”라는 질문을 해보려고 합니다.

쓰는 습관이 생겼다고 해서 바로 좋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리에 앉은 다음에 더 어려운 질문이 시작됩니다.

나는 무엇을 쓰고 싶은가.
그리고 제가 쓰고 싶은 이야기는, 다른 사람도 읽고 싶어 하는 이야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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