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잡담/계속하기 위한 생각

21년 차 개발자인데, 나는 왜 아직도 내가 애매하다고 느낄까

Roslyn 2026. 5. 25. 10:23
반응형

어디서 일한 기간을 말할 때면 문득 목소리가 작아질 때가 있습니다. 21년이라는 시간 동안 웹 개발자로 일해왔으니 남들은 베테랑이라 부를지 모르겠지만, 정작 스스로는 "뛰어난 개발자"라고 말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엄청난 기술적 성취를 이루거나 트렌드를 선도하는 스타 개발자였던 적은 없습니다. 그저 주어진 직장 생활을 성실히 유지하고, 눈앞에 닥친 실무 문제를 해결하며 묵묵히 버텨온 시간에 가깝습니다.

마음 한구석에는 늘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이 출렁였습니다. 그 마음을 모아 밤마다 웹소설을 썼고, 고맙게도 기회가 닿아 온라인 출판까지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시장의 냉정한 결과표 앞에서 제 글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디 가서 당당하게 "작가"라고 제 소개를 하는 것 역시 조심스럽고 망설여집니다.

결국 저는 경계에 선 사람이 되었습니다. 개발자라고 하기엔 특별한 무기가 없는 것 같고, 작가라고 하기엔 내세울 성과가 부족하며, 요즘 대세라는 AI 전문가라고 하기엔 시중의 모델을 활용하는 실무자일 뿐이니 더더욱 아닙니다. 이 셋 중 어느 곳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다는 감각은 오랫동안 저를 '참 애매한 사람'이라는 고뇌 속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이 애매함의 틈바구니에서 발견한 것

하지만 오랫동안 앓아온 이 애매함이, 어쩌면 진정으로 다른 창작자들을 도울 수 있는 뜻밖의 출발점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화려한 최신 기술을 뽐내는 전문가들은 '기능'을 보지만, 저는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의 깊은 '막막함'을 압니다. 플롯이 엉켜 새벽 내내 깜빡이는 커서만 노려볼 때의 피로함, 내가 쓴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 통째로 지워버릴 때의 좌절감을 뼈저리게 겪어보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저는 비록 평범할지언정 서비스를 만들고, 고치고, 끈질기게 유지해 가는 실무 개발자로서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신 AI 기술이 쏟아져 나오며 버튼 하나로 소설을 뚝딱 만들어 준다는 자극적인 광고들이 넘쳐납니다. 하지만 작가들에게 정말 필요한 기술은 창작을 '대신'해 주는 기계가 아닙니다. 엉킨 생각을 스스로 정리할 수 있도록 돕고, 무너진 창작의 리듬을 찾아 다시 자기 문장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조용한 UI/UX 설계가 필요합니다.

화면의 레이아웃을 어떻게 잡아야 눈이 덜 피로할지, 어떤 인터페이스를 제공해야 작가가 기술에 압도당하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원고에 집중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일. 대단한 기술 과시가 아니라, 창작자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는 작은 구조'를 만드는 일. 이것이야말로 두 영역을 서툴게 서성여본 저 같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민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기록을 위한 작은 작업실을 열며

그래서 이 공간을 시작하려 합니다.

여기는 제가 얼마나 대단한 기술을 가졌는지 증명하거나, 가보지 못한 성공의 노하우를 과장해서 전시하는 잘난 척을 위한 공간이 아닙니다. 전문가로서 정답을 단정 짓기보다는, 매일 흔들리면서도 어떻게든 버텨내는 생활형 창작자의 솔직한 고민을 담고 싶습니다.

내가 왜 쓰려고 하는지, 왜 자꾸 멈추는지, 그리고 막힌 흐름을 풀기 위해 어떤 작은 도구들을 고민하고 만들어보았는지 그 서툰 과정들을 고스란히 기록해 두려 합니다.

비록 정점에 서지 못한 애매한 삶일지라도, 쓰다가 멈추고 다시 돌아오는 이 길고 조용한 여정의 기록이 매일 밤 모니터 앞에서 외롭게 글을 쥐어짜 내는 누군가에게 작은 힌트와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완성된 성과가 아니라, 계속하려는 시도들을 차곡차곡 쌓아 나가겠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