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잡담/직장인의 창작

[애매한 개발자의 창작 기록 5] 나는 무엇을 쓰고 싶은가

Roslyn 2026. 6. 2.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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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예전 기억을 꺼냈고, 출판을 해봤던 경험도 돌아봤고, 글을 쓰기 위해 서비스를 만들기 시작한 이유도 정리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한 가지 사실 앞에 다시 서게 되었습니다.

그럼 나는 무엇을 쓰고 싶은가.

어쩌면 가장 먼저 물었어야 할 질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질문을 꽤 오래 피했던 것 같습니다.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정작 무엇을 쓰고 싶은지 선명하게 말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웹소설을 쓰고 싶다, 판타지를 좋아한다, 내가 만든 세계를 보여주고 싶다, 언젠가는 작가로 살고 싶다. 그런 말들은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장르를 정하는 것과,
내가 정말 쓰고 싶은 이야기를 아는 것은 다른 문제였습니다.


1. 처음에는 장르가 답인 줄 알았습니다

예전에는 “무엇을 쓰고 싶으냐”는 질문에 장르로 대답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무협.
판타지.
웹소설.
성장물.
모험 이야기.
세계관이 있는 이야기.

이런 단어들을 말하면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장르는 중요합니다.
독자는 장르를 통해 기대를 품고, 작가는 장르를 통해 이야기의 약속을 정합니다. 판타지라고 하면 독자는 현실과는 다른 세계를 기대하고, 무협이라고 하면 강호와 무공과 성장의 감각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글을 쓰다 보면 장르만으로는 오래 버티기 어렵습니다.

판타지를 쓰고 싶다고 해서 이야기가 저절로 생기지는 않습니다.
무협을 좋아한다고 해서 인물이 곧바로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세계관을 많이 만들어도, 그 안에서 누가 무엇을 원하고 왜 움직이는지가 없으면 이야기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자주 막혔습니다.

설정은 만들 수 있었습니다.
도시 이름도 정하고, 나라의 역사도 만들고, 마법 체계나 능력의 규칙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일은 꽤 재미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닫게 됩니다.

설정은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설정은 무대에 가깝습니다.
무대가 아무리 넓고 아름다워도, 그 위에서 누군가 움직이지 않으면 이야기는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어떤 장르를 쓰고 싶은가”보다 조금 다른 질문을 하려고 합니다.

나는 어떤 마음을 가진 인물을 쓰고 싶은가.
그 인물이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되찾고 싶어 하는가.
그 이야기를 통해 내가 계속 바라보고 싶은 감정은 무엇인가.

이 질문들이 장르보다 더 오래 남았습니다.


2. 저는 대단한 영웅보다, 다시 시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이 갑니다

제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늘 비슷한 인물이 떠오릅니다.

처음부터 강한 사람보다는,
어딘가 부족한 사람.

이미 모든 것을 가진 사람보다는,
무언가를 놓쳤거나 잃어버린 사람.

세상을 구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보다는,
자기 삶 하나도 제대로 붙잡기 어려운 사람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

그런 인물에게 마음이 갑니다.

아마 제 자신이 그런 이야기에 더 가까워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개발자로 오래 일했지만, 대단한 개발자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글을 쓰고 싶지만, 작가라고 자연스럽게 말하기도 아직 어렵습니다.
서비스를 만들고 있지만, 성공한 1인 창업자도 아닙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완성된 사람보다, 애매한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려는 사람을 더 오래 바라보게 됩니다.

웹소설에서는 강한 주인공이 중요합니다.
독자는 답답한 인물을 오래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이 점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쓰고 싶은 인물이 무기력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강함이 꼭 처음부터 완성된 능력일 필요는 없다고 믿고 싶습니다.

계속 돌아오는 힘.
포기하지 않고 다시 선택하는 힘.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 걸음 더 가는 힘.

저는 그런 힘을 가진 인물을 쓰고 싶습니다.

대단한 영웅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사람의 이야기.

그게 지금의 저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주제인 것 같습니다.


3. 제가 좋아하는 것은 세계보다 ‘돌아갈 자리’입니다

저는 세계관을 좋아합니다.

지도도 좋아하고, 낯선 도시의 이름을 짓는 것도 좋아하고, 가상의 나라와 종족과 역사 같은 것을 생각하는 것도 좋아합니다. 그래서 한때는 세계관 만들기 서비스나 판타지 지도 만들기 서비스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오래 생각해보니, 제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 거대한 세계 자체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세계 안에 돌아갈 자리가 있는 것이 좋았습니다.

긴 모험 끝에 다시 불이 켜진 집으로 돌아오는 느낌.
낯선 도시를 헤매다가 작은 여관의 따뜻한 빛을 발견하는 느낌.
어딘가로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감각.

그런 것들이 제게 오래 남습니다.

글쓰기에서도 비슷합니다.

저는 결국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은 것 같습니다.

읽는 사람이 지쳤을 때 잠시 머물 수 있는 이야기.
거창한 교훈을 주지는 못하더라도, 어딘가 조용히 기대어 있을 수 있는 이야기.
주인공이 강해지는 것보다, 주인공이 자기 자리를 다시 찾아가는 과정이 남는 이야기.

어쩌면 제가 메리톡톡에서 “다시 글을 쓰러 돌아오는 구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같은 이유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서비스에서도, 이야기에서도, 돌아오는 자리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 자리는 화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작고, 느리고, 조금 서툴러도 됩니다.

다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4. 읽히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자기만족적인 글만 쓰고 싶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는 사람들이 읽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가능하다면 재미있게 읽히는 글을 쓰고 싶고, 다음 편을 누르고 싶은 글을 쓰고 싶습니다.

이 말을 하는 데 예전보다 조금 더 조심스러워졌습니다.

한 번 출판을 해봤지만 성과가 좋지 않았고, 유료 콘텐츠로 얻은 수익도 아주 작았습니다. 이후에는 유료 연재보다 무료 연재를 중심으로 글을 써왔습니다. 먼저 사람들이 읽고 싶어 하는 글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 더 현실적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내가 쓰고 싶은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독자가 읽고 싶은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독자가 좋아할 만한 것만 따라가다 보면 제가 왜 이 이야기를 쓰는지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결국 필요한 것은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일 같습니다.

내가 오래 바라보고 싶은 감정과,
독자가 계속 따라가고 싶은 사건.

내가 만들고 싶은 세계와,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길.

내가 좋아하는 인물과,
독자가 응원하고 싶은 선택.

이 둘을 맞추는 일이 작가의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 잘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이제는 적어도 이 문제를 피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저는 제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동시에, 누군가 계속 읽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그 둘 사이에서 길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5. 글을 쓰는 이유는 조금씩 바뀌었습니다

중학생 때 나우누리에 글을 올리던 시절에는 그냥 재미있어서 썼습니다.

책 대여점에서 빌려본 무협지가 좋았고, 나도 그런 세계를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누가 읽어주는지, 얼마나 잘 쓰는지, 작가가 될 수 있는지 같은 고민은 크지 않았습니다.

그냥 쓰고 싶었습니다.

직장인이 된 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조금 달랐습니다.

일상이 단조롭게 느껴졌고, 개발자로만 살아가는 삶 바깥에 다른 이름이 필요했습니다. 언젠가 은퇴 후에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그때쯤 더 분명해졌습니다.

그때의 글쓰기는 도피이기도 했고, 희망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조금 더 현실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글을 쓰고 싶지만, 글쓰기만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작가가 되고 싶지만, 아직 작가라고 말하기 조심스럽습니다.
서비스를 만들고 있지만, 그 서비스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글을 완전히 놓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제 글쓰기는 제게 대단한 성공을 위한 도구라기보다, 제가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은지 확인하는 방식에 가까워졌습니다.

저는 글을 통해 계속 저를 확인합니다.

무엇에 마음이 가는지.
어떤 인물을 오래 바라보는지.
어떤 세계로 자꾸 돌아가고 싶어 하는지.
무엇을 잃고 싶지 않은지.

그런 것들을 확인하기 위해 씁니다.


6. 그래서 저는 이런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지금 제게 “무엇을 쓰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예전처럼 장르부터 말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여전히 판타지를 좋아합니다.
세계관이 있는 이야기를 좋아하고, 현실에서 조금 벗어난 무대도 좋아합니다.

하지만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저는 이런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부족한 사람이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
자기 자리를 잃은 사람이 돌아갈 곳을 찾아가는 이야기.
대단한 재능보다, 작게 반복되는 선택이 사람을 바꾸는 이야기.
화려한 승리보다, 다시 앉고 다시 걷고 다시 쓰는 힘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가능하다면, 읽는 사람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너무 거창한 위로를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가 누군가를 위로할 만큼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이야기를 읽는 동안만큼은, 독자가 자기 삶에서 잠깐 떨어져 다른 세계를 걸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아주 조금이라도 덜 지쳐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정도의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7. 애매한 자리에서 계속 쓰기

이 연재의 제목은 “애매한 개발자의 창작 기록”입니다.

처음 이 제목을 붙였을 때, 저는 제 애매함을 정리하고 싶었습니다.

개발자로 오래 살았지만, 개발자로만 설명되기는 싫었습니다.
글을 쓰고 싶지만, 작가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AI가 들어간 서비스를 만들고 있지만, AI 전문가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서비스를 만들고 있지만, 성공한 창업자도 아니었습니다.

그 사이 어딘가에 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리즈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1화에서는 왜 다시 글을 쓰고 싶어졌는지 돌아봤습니다.
2화에서는 출판을 해봤지만 작가라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를 정리했습니다.
3화에서는 글을 쓰려고 서비스를 만들기 시작한 과정을 썼습니다.
4화에서는 AI보다 먼저 필요한 것이 쓰는 습관이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인 이 글에서는 결국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왔습니다.

나는 무엇을 쓰고 싶은가.

아직 완성된 답은 없습니다.
하지만 예전보다는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

저는 완성된 사람의 이야기를 쓰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완성되지 않은 사람이 다시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블로그와 메리톡톡도 같은 방향 위에 있는 것 같습니다.

완성된 작가의 성공담이 아니라,
아직 애매한 사람이 글을 놓지 않기 위해 만든 기록과 도구.

그게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8. 이 시리즈를 마치며

이 다섯 편의 글을 쓰면서 대단한 결론을 얻은 것은 아닙니다.

작가가 되는 방법을 찾은 것도 아니고, 메리톡톡의 정답을 완성한 것도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이 읽는 글을 쓸 수 있는지도 아직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는 조금 분명해졌습니다.

저는 계속 쓰고 싶습니다.

잘 써서가 아니라,
이미 성공해서가 아니라,
누가 작가라고 불러줘서가 아니라,
글을 쓰는 방향으로 제 삶을 조금씩 옮겨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개발자로 살아온 시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개발자로 일하고, 서비스를 만들고, 문제를 고치며 살아갈 것입니다.

다만 그 시간이 글쓰기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려 합니다.

개발자로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에, 저는 글쓰기의 막막함도 구조로 바라보게 됩니다.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기 때문에, 저는 서비스도 단순한 기능보다 사람이 돌아오는 자리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 사이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찾아보려고 합니다.

글을 쓰고,
서비스를 고치고,
다시 글을 쓰고,
그 과정을 기록하는 일.

아마 당분간은 그게 제 방식일 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 작가라고 자연스럽게 말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그쪽으로 조금씩 걸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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