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뚝딱 만들어낸 '남의 코드'를 보며, 작가의 하얀 화면을 생각했다
저는 21년 차 웹 개발자입니다. 대단한 기술 스타는 아니지만, 직장 생활 안에서 필요한 서비스를 만들고 고치며 오랫동안 코드를 만져왔습니다. 그리고 마음 한쪽에는 늘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을 품은 채, 실제로 웹소설을 쓰고 온라인 출판을 경험해 본 초보 작가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 저는 평소처럼 AI 코딩 도구를 활용해 작은 서비스를 만들다가 아찔한 순간을 경험했습니다.
초반에는 아주 매끄러웠습니다. 머릿속 아이디어를 던지자 AI가 수백 줄의 코드를 순식간에 짜 내려갔고, 엄청난 생산성을 손에 쥔 기분이 들었죠. 하지만 프로젝트 덩치가 커지면서 엉뚱한 오류가 반복되기 시작했습니다. 간단한 문제 같은데도 AI는 갈팡질팡하며 엄청난 양의 토큰을 허비하더군요.
결국 제가 직접 개입해 코드를 수정하려고 에디터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순간 숨이 턱 막혔습니다. 화면을 가득 채운 것은, 그간 편하다는 이유로 일절 관여하지 않고 AI에게 통째로 맡겨두었던 완벽하게 낯선 ‘남의 코드’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직접 통제할 수 없다는 감각은 생각보다 큰 무력감을 주었습니다.
그 순간, 모니터 앞의 개발자인 제 모습 위로 화면을 가득 채운 하얀 배경과 깜빡이는 커서 앞에서 절망하던 '작가로서의 나'가 겹쳐 보였습니다. 이것은 코딩 에디터의 문제만이 아니라, AI와 함께 글을 쓰는 현대의 작가들이 마주한 인터페이스의 핵심 문제였습니다.
1. '남의 코드'가 주는 무력감, '남의 문장'이 주는 허무함
개발자가 AI에게 코딩을 통째로 맡겼을 때 마주하는 배신감은, 작가가 AI 소설 생성기로 글을 쓸 때 느끼는 허무함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최근 유행하는 수많은 창작 AI 도구들은 사용자에게 아무런 걸림돌이 없는 '가장 매끄러운 경험'을 제공하는 것을 자랑합니다. 몇 줄의 시놉시스만 넣으면 AI가 알아서 유려한 소설 본문을 뚝딱 만들어내죠. 키보드에서 손을 떼게 해 주니 참으로 친절한 인터페이스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기술이 인간의 모든 고민을 대신하여 매끄러운 자동화를 이룩할 때, 작가는 가장 중요한 상태를 상실합니다. 바로 '내 글'이라는 주체성과 통제권입니다.
이야기가 복잡해지거나 인물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풀어야 하는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AI는 어김없이 한계에 부딪혀 뻔한 클리셰나 엉뚱한 전개를 뱉어냅니다. 이때 작가는 개입해서 글을 고쳐야 합니다. 하지만 앞부분을 AI에게 전부 맡겨왔다면, 작가는 화면 위에서 수만 자의 거대한 ‘남의 글’을 마주하게 됩니다. 내 생각의 줄기에서 뻗어 나오지 않은 문장들은 아무리 훌륭해도 맥락을 분석하기 어렵고, 결국 수정을 포기한 채 다시 AI 생성 버튼만 무력하게 연타하는 악순환에 빠집니다.
2. 개발자의 에디터에서 찾는 '작가적 안전망'
개발자들은 AI를 사용할 때 '남의 코드'가 되어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의도적인 불편함을 감수하곤 합니다. 상세한 프롬프트(지침)를 미리 별도로 작성해 두고, 세부 계획을 수립한 뒤, AI가 그 설계도를 벗어나지 않도록 끊임없이 확인하며 통제권을 유지합니다. 프로젝트가 커졌을 때 언제든 내가 개입해서 수정할 수 있는 '내 코드'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진정으로 작가를 위하는 UI/UX 기술 역시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좋은 창작 인터페이스는 작가의 손을 완전히 놀게 만드는 기술이 아닙니다. 오히려 개발자의 설계도처럼, 작가가 세워둔 세계관과 플롯이라는 세부 계획을 집필 화면 옆에 명확히 유지해 주고, AI가 인간 작가의 리듬을 깨뜨리지 않도록 철저히 '보조 장치'의 자리로 밀어내 주는 구조여야 합니다.
- 자동 생성이 아닌, 조율된 디자인적 마찰: 한 장의 에피소드를 통째로 채워주는 UI가 아니라, 작가가 막힌 골목에 섰을 때 생각을 툭 건드려 다시 스스로 키보드를 두드릴 수 있게 돕는 인터페이스.
- 언제든 내 문장으로 돌아오는 흐름: AI의 제안을 조심스럽게 참고하더라도, 이것이 내 이야기의 맥락을 해치지 않고 언제든 안심하고 내 글로 복귀할 수 있도록 지탱하는 시각적 안전망.
3. 완성된 사람의 전시장이 아니라, 계속 쓰는 사람의 조용한 작업실로
브랜딩과 기술의 홍수 속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내 역량보다 감당하지 못할 이미지를 먼저 만드는 것입니다.
AI가 소설을 알아서 척척 완성해 줄 것이라는 과장된 환상은, 결국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남의 이야기'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뿐입니다.
저는 AI를 깊이 연구하는 전문가도 아니고, 모델을 직접 만드는 사람도 아닙니다. 다만 21년 동안 웹을 만들고 고치며 버텨온 실무 개발자의 시선으로, 글을 쓰고 싶어 하는 한 명의 창작자로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기술에 압도당하지 않고 오롯이 나만의 작업대를 지켜낼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AI를 앞세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개발자로 살아온 제 작은 경험과 UI/UX적 고민이, 글을 쓰는 사람이 다시 자기 생각과 문장으로 돌아오는 데 조심스럽게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곳은 대단한 성과를 전시하는 곳이 아닙니다. 개발과 글쓰기 사이에서, 우리가 기술의 주도권을 잃지 않고 '오래, 그리고 계속 쓰는 방법'을 찾아가는 솔직한 작업 노트들을 차분히 쌓아가겠습니다.
부디 이 기록들이 글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누군가에게 작은 공감과 실마리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