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 통신과 컨텐츠 소비
"2400... 9600... 14400..."
여러분, 혹시 이 숫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나요? 마치 암호 같은 이 숫자들을 듣고 가슴 한구석이 찌릿했다면, 아마 저와 같은 시대를 공유하신 분들일 겁니다.
네, 맞습니다. 바로 그 시절 우리의 밤을 뜨겁게 달궜던 **'PC통신 모뎀의 접속 속도'**입니다.
지금의 기가 인터넷에 비하면 정말 보잘것없는 속도였죠. 하지만 그 느린 속도를 뚫고 연결되던 순간의 그 소리를 기억하시나요?
(삐- 찌지지직... 띠디디딩-)
저녁 시간, 부모님이 주무시고 나면 전화 쓸 일이 없을 테니, 그때만 숨죽여 기다렸습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몰래 모뎀을 연결하곤 했죠. 혹시나 걸릴까 봐 노심초사하는데, 접속음은 또 왜 그렇게 크게 들리는지... 이불로 모뎀을 꽁꽁 싸매기도 했었죠.
당시 KT에 모뎀을 신청하면 노트북만 한 통신기기를 무상으로 임대해 줬던 거, 기억나십니까? 비록 2400bps짜리라 글자 뜨는 속도도 눈에 보일 정도였지만, 그게 어디입니까? 그 파란 화면 속에 세상이 있었는데요.
그렇게 어렵게 접속하면, 애니메이션 이미지 한 장 받는 데 한 세월이 걸립니다. 위에서부터 한 줄, 한 줄... 그림이 그려지는 걸 멍하니 보고만 있어도 행복했습니다. 물론, 다음 달 전화비 고지서를 본 어머니의 등짝 스매싱은 각오해야 했지만요.
제가 가장 많이 머물렀던 곳은 '게시판'이었습니다. 특히 하이텔을 시작으로, 지금 웹소설의 조상이 된 이야기들이 그곳에서 태동하고 있었죠.
초등학생이 쓴 듯한 귀여운 글들 사이로, 훗날 거장이 된 작가들의 초기작들이 보석처럼 박혀 있던, 그야말로 PC통신의 보물창고였습니다.
제 기억 속 최고의 작품은 단연 하이텔의 **'퇴마록'**입니다. 최근 웹툰과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나오는 걸 보니 가슴이 벅차더군요. 제가 지금까지도 신마소설, 귀신 싸움 이야기에 환장하는 이유가 바로 이 소설 때문입니다.
퇴마록의 백미는 인터넷에 떠도는 괴담을 현실로 끌어들이는 듯한 연출과 몰입감이었습니다. 현암, 준후, 박 신부... 그들의 활극에 빠져 밤을 새우곤 했죠.
사실 저는 겁쟁이입니다. 공포 영화는 질색이고, 아이들이 태어나고선 더 못 보게 됐어요. 그런데 어릴 땐 누나랑 이불 뒤집어쓰고 '전설의 고향'을 눈만 빼꼼 내놓고 봤던 기억이 납니다. 무서워하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는 그 짜릿함, 퇴마록이 딱 그랬습니다.
퇴마록뿐인가요? '드래곤라자' 같은 판타지 소설도 엄청났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같은 기성 베스트셀러와 나란히 서점에 진열되던 PC통신 문학의 황금기였습니다.
온라인의 열정은 오프라인으로도 이어졌습니다. 만화가가 꿈이었던 저는 '앙끄(ANC)'나 '망가' 같은 동호회 행사에 꼭 참여했습니다. 코엑스 같은 곳에서 열린 학생들의 만화 장터. 어설픈 로맨스 만화책과 굿즈들을 구경하고, 만화 캐릭터를 코스프레한 사람들을 보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스마트폰으로 1초 만에 세상 모든 정보에 접속하는 지금, 왜 그때만큼의 몰입감은 느껴지지 않는 걸까요?
비디오 가게에서 고르고 골라 빌려온 테이프는 1초도 놓치지 않고 봤는데, 지금은 넷플릭스를 켜놓고 1.25배속으로 돌리거나, 그마저도 귀찮아 유튜브 요약본을 찾습니다.
어릴 적 문방구 앞 해적판 만화책을 보며, 돈이 없어 표지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 간절함. 오락실에서 동전 하나를 쥐고 신중하게 게임을 고르던 그 마음.
지금은 보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그것을 살 재력도 생겼는데... 정작 '가슴 뛰게 하고 싶은 것'은 사라진 기분입니다.
그때가 더 재밌었던 건, 우리가 어려서였을까요? 아니면, 무언가를 얻기 위해 '2400bps의 속도'로 기다릴 줄 알았던, 그 간절함의 차이였을까요?
수많은 컨텐츠들의 목록을 보면서도 볼게 없다는 푸념을 늘어놓는 것은...
정말... 그저 나이가 들어서일까요?
아마도 그 시절에는 다른 사람이 만드는 컨텐츠를 즐기는 것에도 낭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처럼 빠르게 소비하고 사라져 버리는게 아니라, 소비를 하는 마음가짐이 사뭇 달랐던 거죠.
저는 지금도 가끔, 그렇게 진열대에 진열된 비디오나 만화책을 고르듯이, 망설임의 시간을 가져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신중하게 고르는 그 순간, 그 자체가 어쩌면 너무도 즐거운 시간이었던게 아닐까 싶네요.
그때 그시절, PC통신이라는 새로운 세계가 만든 낭만을 기리며, 영화 접속의 OST를 들려드립니다.
좋은 밤 되세요.